능소화
◈최재영◈
한동안 넝쿨만 밀어 올리던 능소화나무
좁은 골목길 담장에 기대어
황적(黃赤)의 커다란 귀를 활짝 열어젖힌다
한 시절 다해 이곳까지 오는 길이
몽유의 한낮을 돌아 나오는 것 같았을까
지친 기색도 없이 줄기차게
태양의 문장들이 돋아난다
서로를 의지하는 것들은
보지 않아도 뒷모습이 눈에 익는 법
오랫동안 등을 맞대고 속내를 주고받던 담장이
울컥, 먼저 뜨거워진다
(…)
----------------------------------------------------------------
▶최재영=(1965~)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2005년 《강원일보》와 《한라일보》, 200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창작기금 수혜.
시집 『루파나레라』(천년의시작, 2010)가 있음.
능소화의 영어 이름은 트럼펫 크리퍼(trumpet creeper)다. 담장을 기어오르며 붉은 트럼펫
을 불어대는 능소화들의 축제로 온 세상이 뜨겁다. 8월, “태양의 문장들”이 하늘에 울려 퍼
진다. 뒤에서 그것들을 키워온 담장도 “울컥 뜨거워진다.” 계절마다 새로운 ‘신의 선물’이 핀
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joins.com/2016.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