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청(秋晴)
◈정완영◈
필시 무슨 언약이 있기라도 한가부다
산자락 강자락들이 비단 필을 서로 펼쳐
서로들 눈이 부시어 눈 못 뜨고 섰나부다.
산 너머 어느 산마을 그 언덕 너머 어느 分校
그 마을 잔치 같은 운동회 날 갈채 같은
그 무슨 자지러진 일 세상에는 있나부다.
평생에 편지 한 장을 써본 일이 없다던 너
꽃씨 같은 사연을 받아 봉지 지어 온 걸 봐도
천지에 귓속 이야기 저자라도 섰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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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완영=(1919~2016) 김천에서 출생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
1962년 '현대문학' 등단.시조집 '채춘보' ‘묵로도’ 등.
1979년 가람시조문학상, 제11회 한국문학상과
제3회 중앙시조대상
한국적 가락으로 한국적 정서의 경계를 높여온 시인. '비단 필'에 '갈채'까지 얹던 가을을 두고
떠났다. 일찍이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조국')로 벌거숭이 조국을 '줄 고르'더
니 '내 고향 하늘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고향 생각')으로 집 떠난 마음들을 울렸다. 그 '손'
에 닿으면 이 땅의 숨탄것들은 서러운 하늘을 열고 수척한 소리를 얻고 그리움의 깊이를 앓았
다.
그런 굽이마다 그린 김천 선영에서의 첫 가을. 김천(金泉)의 '백수(白水)'('泉'을 풀어 지은 호
)로 돌아갔으니 별들도 갈채를 보내리. '한국시의 종가(宗家)'라던 시조 한생에 '눈이 부시어'
하늘도 더 푸르리. 게서도 지상의 귓속 이야기로 꽃씨 봉지 하마 지으실까…
정수자 시조시인 [가슴으로 읽는 시조]
Chosun.com/2016.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