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이경숙◈
시들지 않은 풋것처럼 1℃에서 살고 싶다
손가락이 가늘고 긴 그 남자가 생각 나
여름밤 탑동 바닷가 하얀 건반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너를 열어보고 싶었다
불타는 냉장고 속 먼저 간 첫사랑이
코드를 뽑아 버리자 별이 되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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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1962~ )
제주시 한경면 판포리 출신인 시인은
2001년 제11회 제주문인협회 신인문학상 시조부문 당선 경력이 있다.
2005년에는 '시조시학'가을호 신인상에 뽑혔다. 시인은 첫 시집을 내며
"억새 물결에 가슴 젖는 시, 그런 시를 찾아 떠나야겠다"고 적었다
상쾌한 온도 되찾기가 이리도 힘든 일이던가. 처서 지나면 가을 맛 드는 삽상한 바람에 행복
했는데 올 폭염은 뒤끝도 작렬이다. 더위 식힐 냉수 찾느라 더 자주 연 냉장고도 올여름은 숨
이 더 찼겠다. 냉장고를 열면 그 속의 풋것들처럼 몸 마음 싱싱해질 서늘한 기온이 간절해지
곤 했다.
그런데 '시들지 않는 풋것' 같은 '첫사랑' 냉장고도 있나 보다. '하얀 건반'이 될 정도로 생각
한 '그 남자'는 '시도 때도 없이 열어보고 싶'던 그 열망을 알았을까. 겉은 차가우나 '불타는
냉장고 속' 같은 정념을 짐작이나 했을까.
대부분 혼자 앓기 마련인 첫사랑은 그렇게 추억의 냉장고 속에 갇힌다. 하지만 냉장 보관 중
인 추억도 '코드를 뽑아 버리'면 끝이다. 그래도 '별이 되어 맺'히니 가끔 불러보면 되리라.
이 뜨거운 여름 또한 지나가면 별처럼 돌아보게 하듯.
정수자 시조시인 [가슴으로 읽는 시조]
Chosun.com/2016.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