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보낸 시절
◈박 준◈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 보았다
-박준 作 <환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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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1983년 서울에서 출생.
2008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년 문학동네>
제31회 신동엽문학상 시 부문 (2013)
■간단치 않은 재능이다. 일상 속에서 이렇게 빛나는 이미지들을 길어올릴 수 있다는 게 놀
랍다. 당신을 중심에 놓고, 당신을 표현해 줄 이미지들을 찾아나가는 솜씨가 아름답고 슬프
다.
한 시절을 함께 보냈던 '당신'을 기억하는 일이 이다지도 젊고 신선하다. 추상적이고 식상한
미사여구 대신에 사용한 단어들이 빛을 발한다.무릎, 황도와 백도, 물복숭아 같은 단어들이
쉽게 느낌을 전달해주고도 남는다.
'무릎'이나 '물복숭아' 같은 단어들이 이렇게도 짜릿할 수 있다니. 단어를 선택할 줄 아는 시
인이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젊은 시인의 시답게 현대시가 갖추어야 할 미덕들을 고루 갖추
고 있다. 아련하고 매력적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시가 있는 월요일]
mk.co.kr/2016.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