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난을 치다 ◈배옥주◈ 칼바람이 난을 치네 바람의 모필이 능선을 일으키네 둥근 달집 속으로 날개를 태우며 불새들이 날아가네 묵향을 물고 가는 수천의 부리 마지막 한 획까지 서늘한 화염을 휘갈기네 붉은 발목 자르고 달아나는 억새 절명의 숨소리로 불의 낙관을 찍네 벼랑을 끌어안은 달의 속필 선담후농의 부작난不作蘭 활活활活 허공의 이마에 걸어놓네
--------------------------------------------------------------- ▶배옥주=(1962~) 부산에서 출생.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2008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오후의 지퍼들』(서정시학, 2012) ‘부작난(不作蘭)’은 추사 김정희가 20년 만에 묵으로 친 난초 그림이다. 이 시는 이 그림이 탄생되는 과정을 시화(詩化)한 것이다. 실제 부작난도의 난초는 붉은 난이 아니라, 묵으로 친 검은 난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열 개도 넘는 붉은 낙관들("불의 낙관”)이 찍혀 있다. 화염과 수천의 불새가 난무하는 풍경은 언뜻 예술의 불멸성을 떠올리게 한다. 예이츠(W B Yeats)도 예술 가를 “신의 신성한 불꽃 속에 서 있는 현자들”이라고 했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Chosun.com/2016.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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