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장갑
ㅡ 오탁번(1943∼)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중략…)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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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목화꽃은 따로 있는데 우리는 솜 달린 목화 열매를 목화꽃이라고들
부른다. 꽃이 아닌 것이 꽃이 되는 이유는 첫째, 모양이 어여뻐서이고 둘째,
쓰임새가 어여뻐서이다. 나아가 이 시에는 그 셋째 이유가 나온다.
꽃도 아닌 꽃이 여든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에 영영 피어 있으니 그것을
꽃답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누나와 엄마는 여름 내내 목화를 열심히
키웠다. 어린 소년도 손을 보태 자잘한 순을 잘라내며 일조했다.
그래도 어린애는 어린애인지라 엄마 몰래 목화 다래를 따먹으며 열매를
축내기도 했다. 걸리면 누나와 엄마에게 혼나기 일쑤였지만 소년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누나와 엄마가 혼내는 이유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인 것을. 저 목화를 튼실히
키우면 내 아들이 따뜻하겠지. 저 목화를 많이 거둬 동생 장갑 떠줘야지.
이렇게 누나와 엄마에게는 사랑의 계획이 있었다.
이 계획은 여름 내내 무르익어 소년의 벙어리장갑이 되었다. 많이 쌓인 눈을
잣눈이라고 한다. 까치설날이고 눈이 폭폭 쌓였으니 아이들에게는 천국이라.
게다가 누나의 사랑까지 받았으니 더욱 든든했을 것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시가 깃든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