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27. 18:56ㆍ″``°☆아름다운글/◈이외수님글
이외수-감성사전-(01~15)
◈01.- 원고지
삼라만상이 비치는 종이거울
◈02.- 겨울
깊은 안식의 시간 속으로 눈이 내린다. 강물은 얼어붙고 태양은 식어 있다.
나무들이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회색 하늘을 묵시하고 있다.
시린 바람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히고 차디찬 겨울비가 독약처럼 배어 들어도
나무는 당분간 잎을 피우지 않는다.
만물들이 마음을 비우고 冬安居에 들어가 있다.
모든 아픔이 모여 비로소 꽃이 되고 열매가 됨을 아는 날까지 세월은 흐르지 않는다.
겨울도 끝나지 않는다.
◈03.- 방랑
아무런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일이다. 떠돌면서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는 일이다.
외로운 목숨 하나 데리고 낯선 마을 낯선 들판을 홀로 헤매다 미움을 버리고
증오를 버리는 일이다. 오직 사랑과 그리움만을 간직하는 일이다.
◈04.- 망각
세월의 무덤 깊이 과거에 대한 기억의 시체들을 완벽하게 암장시켜 버리고
마침내 일체의 번뇌와 무관해져 버리는 상태
◈05.- 바람
휴지조각들이 을씨년스럽게 날아 오르는 겨울의 공터에서,
개나리가 오스스 꽃잎을 떨고 있는 봄날의 담벼락 밑에서,
바다가 허옇게 거품을 뿜으며 기절하는 여름의 해변에서,
낙엽들이 새 떼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는
가을의 숲 속에서 장님도 바람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귀머거리도 바람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바람은 살갗만을 적셔주는 대지의 입김이 아니라
온 가슴을 적셔주는 신의 입김이기 때문이다.
◈06.- 아침
자명종이 수험생들의 고막 속에다 비명 같은 경보신호를 발사하고 직장인들이
아내의 발길질에 걷어채이며
소스라치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면 하루의 전쟁이 시작된다.
인간들은 대개 현실에 소속되어 있고 시간의 위수령을 이탈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행복이라는 이름의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날마다 단독으로 적진에 뛰어든다.
인간들은 스스로를 병사이면서 병기라고 생각한다.
병사가 꼬질대에 기름칠을 해서 총구를 쑤시듯이 치솔에 치약을 발라 이빨을 닦고
총열에 탄알을 장진하듯이 식도에 밥덩어리를 밀어 넣는다.
행복이라는 이름의 고지는 금력과 권력을 무기로 앞세운 자들에게는 가깝게 느껴지고
청렴과 결백을 무기로 앞세운 자들에게는 멀게 느껴지는 장소에 위치해 있다.
대개의 인간들이 아침마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서면 대문 바깥이 모두 적진이다. 이 세상 생명체가 모두 적군이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이름의 고지가 바로 자기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은
단지 아침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에게 경배한다.
아침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찬란하지는 않은 것이다.
◈07.- 평화
전쟁발발의 합리적 근거.
◈08.- 과대광고
소비자는 왕이다-라는 식의 광고.
◈09.-조간신문
아침마다 담 너머로 던져지는 우리들의 생활기록부다.
하루가 시작되는 문설주에서 거울처럼 들여다보이는 우리들의 일상사다.
비바람에 펄럭거리는 세상도 보이고 눈사태에 휩쓸려가는 세월도 보인다.
자유의 새순이 돋기도 하고 독재의 사슬이 번뜩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조간신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침에만 배달되지는 않는다.
산간벽지에서는 夕刊舊聞으로 둔갑해서 이틀쯤 늦게 배달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정기구독자들은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산간벽지에서는 세월도 이틀쯤 쉬었다 가기 때문이다.
◈10.- 일회용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용품이다.
자연적인 용품과 인위적인 용품이 있다.
탄생도 일회용이고 죽음도 일회용이다. 처녀도 일회용이고 동정도 일회용이다.
일회용 종이컵도 있고 일회용 라이터도 있다.
일회용 주사기도 있고 일회용 반창고도 있다.
전자는 자연적인 용품이고 후자는 인위적인 용품이다.
그러나 물질이 인간을 우선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일회용이 되고 만다.
◈11.- 주인공
작중인물 중에서 가장 목숨이 끈질긴 존재.
◈12. 엑스트라
대본의 등장인물란에 이름대신 복수 접미사나 숫자로 표기되는 배역.
연기에는 태연하고 인기에는 초연한 존재.
등장과 퇴장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3.- 병살타
야구에서 공격자의 타구가 수비자의 손에 걸려
자기팀의 뛰는 놈과 나는 놈을 모두 척살시켜 버리는 불상사를 말한다.
권투에서는 선수와 심판을 한꺼번에 때려 눕히는 경우를 말하며
세상살이에서는 사랑과 우정을 한꺼번에 놓쳐 버리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겹치는 불행 뒤에는 언제나 겹치는 행운이 뒤따른다.
만약 불행을 통해 자기를 반성하고 노력을 배가시킬 수만 있다면
누구든 불행이 그만한 크기의 행운을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위해
필수적을 거쳐야 하는 예비관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14.- 허수아비
농업에 이용되어졌던 인류 최초의 로보트.
◈15.- 인신매매
황금에 눈이 뒤집힌 파렴치한들이 몇 푼의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동족들을 악마에게 팔아넘기는 행위.
또는 인간을 상품화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도모하는 모든 행위.
비천한 인간들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저질적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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