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부끄러움을 이미 다 보았거니
굳이 남은 것들을 들추어 무엇하리
하늘이 무명옷 한 벌 밤새 지어 입힌다.
지상에 은성(殷盛)하는 어둠보다 더 큰 사랑
한없이 다독이며 안아주는 용서 앞에서
아기의 젖니가 돋듯 태어나는 세상이여.
달과 별이 숨었어도 스스로 차는 밝음
나무들 하나같이 뿔 고운 순록이 되어
한잠 든 마을을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
▶조동화=(1948~ ) 경북 구미 출생,
197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화암> 당선.
시집 <낙화암> 비롯, <산성리에서>, <처용 형님과 더불어>,
<강은 그림자가 없다>, <낮은 물소리>,<눈 내리는 밤>, <영원을 꿈꾸다> 등
시집 발간. 8번째 시집인 "나 하나 꽃피어"에는 75편의 시 수록.
섣달에는 눈이 참 많이 쌓였다. 그렇게 눈보라 치던 고샅도 가래떡 흰 김이 오르면
불현듯 훈훈해졌다. 눈을 밟으며 마을 어른들께 세배를 다니는 날은 몸 마음이
새록새록 하얘지곤 했다. 그때의 '뽀득뽀득', 그 순결한 소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도심의 눈은 지상에 닿자마자 시커멓게 변하는 무슨 오욕(汚辱)처럼 빨리 치워야 할
대상이 돼버렸다.
그래도 한밤의 눈은 여전히 축복이다. 낮의 허물을 다독이는 밤의 정화(淨化)다.
모든 것을 덮는 하늘의 용서다. 그래서 아침이면 악다구니 세상도 '아기의 젖니가 돋듯'
새로 태어난다. '나무들 하나같이 뿔 고운 순록이 되'는 눈 내리는 밤, '한잠 든 마을'의
순결한 평화 속을 걷고 싶다. 한 마리 순록이 된 양 두고 온 시간의 숲 어딘가로―.
정수자.시조시인
Chosun.com/2014.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