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부들이 몰려와 땅을 파고 아파트를 심은 건
고교 입학 무렵이었다 맨 먼저 커다란 파일이 내려가
지하 깊은 곳에 붉은 뿌리를 박았다
모세혈관 같은 철근들이 묶이고
제법 단단한 각질이 덧대어지기도 했다
시끄러운 소음과 분진을 광합성하며
자고 나면 조금씩 높아지는 아파트,
그 위를 크레인이 내려다보며 키를 재곤 했다
건물 층층마다 유리가 끼워지자 가끔씩
저녁 해가 모서리에서 붉게 터졌다 (…)
아파트가 해를 가린 즈음부터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아파트가 자라지 않는 외곽으로
이삿짐 트럭을 몰고 꽃피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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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1972~ )충청남도 보령에서 출생.
2001년 《문학사상》 에 〈수배전단〉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 시집으로
『리트머스』詩川, 빈터, 시산맥 동인
"헤이리 아트밸리" 사무국 홍보팀장 근무
30여 년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한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보고 입을 모아
경탄한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성공적 삼림녹화, 고속도로망의 발달과
급격한 도시화다. 수림이 무성해지고, 길이 훤하게 트이고, 고층 아파트 건물들이 온
나라를 뒤덮은 것이다.
나무가 크게 자라려면 몇십 년 걸리지만,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데는 이삼 년이면
족하다. 도처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고향에 성묘를 갔다가 길을 잃는
사람도 생겼다. 한적했던 옛 농촌이나 전원풍경을 되찾기는 힘들다. 도시가 끝없이
커지며 서로 이어져 있어, 이제는 ‘아파트가 자라지 않는 외곽으로’ 떠날 수도 없게
된 것 같다.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joins.com/2014.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