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 안을 나오며
◇정병근◇
버둥거리는 염소의 입에 소금을 먹이고
목을 따자, (…)
노파가 양은솥을 대고 피를 받아낸다
염소의 뜬 눈이 광속으로 허공을 가른다
영감이 버너불로 염소를 그을린다
불똥 속에 드러나는 염소의 얼굴
어금니를 꽉 다문 저 무표정이 무섭다
털을 다 그을린 영감이 담배를 피워 문다
담배를 빠는 볼이 대추꼭지처럼 쪼글쪼글하다
염소보다 영감의 팔자가 더 세서
염소는 죽어서도 영감을 저주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기억하며 사는 인간만이 불행할 뿐,
기억이 짧은 염소는 그 짧은 기억의 힘으로
죽으면 죽었지 미련하나 남기지 않는다
오후의 설핏한 해가 힘 센 허기를 몰고 온다
허기는 얼마나 골똘한 망각인가
뒤 안을 나오는데 우리 속의 염소들이
누구시냐는 듯 멀뚱멀뚱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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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근=(1962~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계간 <불교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현대시학>에 ‘옻나무’ 외 9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번개를 치다』
힘 센 허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 골똘한 망각 속에서 죽어가는 염소와 염소를
도축하는 영감에 대한 묘사는 가차 없고 숨김이 없다.
평생을 기억하며 사는 불행한 인간과 기억이 짧아서 살고 죽는 일에 미련하나 남기
지 않는 염소와, 뒤 안을 나올 때 누구시냐는 듯 쳐다보는 우리 속의 염소들은 얼마
나 쓸쓸한가.
우리 속을 우리의 마음속으로 고쳐 읽을 때, 골똘한 망각에 대해, 힘 센 허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황병승·시인>
joins.com/201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