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이 오면-겨울제祭1
⊙이성희⊙
겨울밤이 오면, 잠들지 못하는 겨울밤이 오면 어찌할 거나, 할머니 이빨 빠진 잇몸 사이로 흘러 다니는, 머리 없는 귀신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밤 허공에 실핏줄이 서는 전신줄의 귀곡성도 울리지 않는 겨울밤, 내밀한 창문의 불빛을 흔드는 메밀묵 장수의 가락도 없는, 잠들지 못하는 긴긴 겨울밤이 오면, 어찌할 거나,
삼십 촉 전등 밑에 숨어서 낡은 등사기로 어둠을 밀 때 콜타르와 함께 밀리던 섬뜩한 불온 문자도 없는, 먼 떠돌이별이 다락방 창을 노크하지 않는 겨울밤,
유리에 서리는 설움의 투명한 결정체도, 세상 끝에서 울려오는 부엉이 울음소리도 없는, 밤, 저 긴 긴 겨울밤이 오면, 어찌할 거나, 그리움 하나 없는,
-이성희(시집'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솔·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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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희=(1959~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 취득 1989년 ≪문예중앙≫ 시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 <당신의 이름> 문학수첩 1997 시집 <안개 속의 일박> 전망 2001 시집 <허공 속의 등꽃> 신생 2003 현재 계간지 '신생' 편집위원
자월(子月·음력11월)에 들어오면서 그야말로 본격적인 겨울철(亥, 子, 丑月)을 맞이하게 되었다. 자월은 다른 어느 달보다 음기(陰氣)가 가장 극성한 때(六陰)이지만, 동지(冬至) 를 지나면(동지 10일 후)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하므로 양기(陽氣)의 싹을 돋우어 또 다시 새로운 순환을 펼쳐가게 될 것이다. 소한(小寒)을 지나고 연중 마지막 절기인 대한 (大寒)까지 그리고 내년에 다시 입춘(立春)의 새해가 올 때까지(아니, 경칩 때까지) 추운 겨울의 기나긴 역정(歷程)이 기다리고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모(歲暮)는 추위 속에서도 어김없이 찾아오고, 며칠 후면 제야(除 夜)의 마지막 종소리를 들으면서 어느 해보다 더더욱 숨이 꽉 막혔던 답답함과 온통 안 타까움으로 얼룩졌던 올해 2014년, 오래토록 잊지 못할 이 갑오년을 되돌아보게 될 것 같다.
시적 분위기가 다분히 회고적이다. '할머니'의 '머리 없는 귀신 이야기'도 '메밀묵 장수의 가락도''유리에 서리는 설움의 투명한 결정체도''부엉이 울음소리도' 심지어 '삼십 촉 전등
밑에 숨어서' 남몰래 등사하던 '불온 문자도' 이제는 모두 사라져버린 어쩌면 삭막하기만 한'긴 긴 겨울밤'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리움 하나 없는' 것이 아니라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가 다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이 '긴 긴 겨울밤'의 역설적 표 현이다.
전통적인 리듬에 어울릴 듯한 '겨울밤이 오면 어찌할 거나'를 반복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산문시의 자유로운 율조로 빚어놓은 가슴 저미는 '겨울제祭' 연작시 중 한 편이다.
오정환 시인 busan.com/2014.12.26
http://blog.daum.net/kdm2141/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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