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a Gevorgian -'Dvin'
수박을 들고 가는 사람
◆이선영◆
(…)
쩌어억 쩌르럭
속이 벌어지기 전에는 아직 마법에 걸리기 전의
허드레 호박이나 다름없는 덩어리이련만
저이의 입꼬리에 담긴 결의와 수고로운 팔다리를 보라,
잘 익은 붉은 태양이라도 담아가는 듯한 기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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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1964~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0년 ‘현대시학’에 「한 여름 오후를 장의차가 지나간다」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오, 가엾은
비눗갑들」「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평범에 바치다」 등이 있다.
현재 ‘21세기 전망’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여름이면 집집마다 물의 여왕들이 배달된다. 여름의 기쁨이고 보람인 이것! 아버지들은
새끼들의 타는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려고 과일전의 수박 덩어리를 집까지 들고 오는 것
이다. 왼손은 오른손의 안부를 묻고 오른손은 왼손의 안부를 묻는다. 그렇게 잘 도착한
수박을 자르는 것은 엄마의 몫이다.
둥근 덩어리가 반구(半球)로 쩍, 하고 갈라지면, 이 녹색 보석상자가 품은 것은 잘 익은
붉은 태양, 아아, 붉은 천공에 점점이 박힌 까만 별들, 그러나 속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아버지들이 결의와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까닭에 여름의
행복한 찰나들을 맞던 시대는 그래도 살 만했다.
<장석주·시인>
joins.com/2015.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