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퍼먹으며
◆김성규◆
나, 걸었지
모래 위에 발자국 남기며
길은 멀고도 먼 바다
목말라 퍼먹을 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
뒤를 돌아보았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 부를까
이미 지워진 발자국
되돌아갈 수 없었지
길 끝에는 새로운 길이 있다고
부스러기처럼 씨앗처럼 모래 흩날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
이제 혼자 걷고 있었지
깨어보니
무언가 집에 놓고 왔을까
이미 지워진 발자국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으며
목말라 퍼먹을 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을까
-김성규 作 <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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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1977∼ )1충북 옥천에서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등이 있다.
■ 유랑이라는 게 뭘까? 생각해보면 어딘가를 떠돈다는 것은 행복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환희보다는 절망이, 미래보다는 과거가 더 힘을 발휘하는 상황이 아닐까. 방황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몸과 마음이 방황을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게 인생이
다. 매일매일 목표가 있고, 매일매일이 행복하다면 그것이 어디 인생인가. 이 시는 방황의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지나온 발자국마저 지워져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그것이 방황이다.
되돌아갈 수도 없으니 '기억을 퍼먹으며' 가는 것이 유랑이고 방황이다. 인생에 한번쯤 방
황을 해야 할 때 기억은 참 큰 힘이 된다. 언젠가 찾아올 유랑을 위해 '기억'을 많이 만들어
놓아야겠다. 기억은 힘이 세니까.
[허연 문화부장(시인)][시가 있는 월요일]
mk.co.kr/2015.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