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곰팡이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푸른 곰팡이
산책시(散策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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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1959~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와 산문집 『내가 만난 시와 시인』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사저널' 취재부장과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역임.
현재 경희대와 경희사이버대학교에 출강.
속도 지배의 세계는 “발효의 시간”을 버린다. 세계는 채 익기도 전에 버려지는 것들로 가득
하다. 더디 가는 시간의 “푸른 강”은 사라지고 없다.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 당신에게 가보
고 싶다. 빨간 우체통은 그리움과 기대감으로 넘치고, 당신은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인 그 먼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속도가 제왕인 세계는 이런 발상을 낭만적 혹은 시대착오적 “곰팡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곰팡이도 발효의 시간을 겪는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joins.com/2016.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