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리
◇보르헤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들은
어느덧 내 영혼의 고갱이라네.
분주함과 황망함에 넌덜머리 나는
격정의 거리들이 아니라
나무와 석양으로 온화해진
아라발의 감미로운 거리,
불후의 광대무변에 질려
대평원 그리고 참으로 광활한 하늘이 자아내는
가없는 경관으로 감히 치닫지 못하는
소박한 집들이 있는,
자애로운 나무들마저 무심한 한층 외곽의 거리들.
이러 모든 거리들은 영혼을 탐하는 이들에겐
행복의 약속이라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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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아르헨티나 출신의 시인·소설가. 실험적이고 독특한 발상의
작품들을 남겨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로 불리며 움베르토
에코 등 현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픽션들’ ‘칼잡이들의 이야기’ 등 그의 대표작들이 여럿
번역돼 있다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의 첫 시집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의 권두시다. 보르헤
스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시의 꿈을 키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다양한 공간, 예컨대 거리·
잡화점·점방·담벼락·오두막·광장·길모퉁이를 사랑했다. 그 거리는 그의 영혼의 “고갱이”(중
심)였고 “행복의 약속”이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공간에 의미의 꽃을 심는 자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joins.com/2016.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