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의 밤
◈조병완◈
대낮부터 예비된 밤은 깊게 고랑이 졌,
청주에서 안성까지 도로는 깊은 고랑,
기억은 고랑으로 빠져 사라졌,
네게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
사과할 줄 모르는 기억과
용서할 수 없는 기억 사이에서 밤의 고랑은 깊어졌,
계절을 업고 네 위를 건너야 했,
너는 징검다리로 길게 누워 무심하였,
계절은 자꾸 흘러내리고 청량한 물을 먹고 싶었,
선운사 동백은 아직 피지 않았다 했,
(…)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에서
모래가 쉬르르르 쓸려다녔, 밤은 파들거렸,
함박눈이 날리듯 밤은,
검붉은 꽃잎으로 파들거리며 내 위에 얹혀졌,
손발을 움직일 수 없는 몸,
꽃잎 아래 파묻혔, 깊이 묻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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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완=(1957~ )전북 고창에서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공부
그림을 그리며 시를 쓰다가 1999년 『시와반시』
에 「옴니버스 회화」 외 4편으로 등단했다.
시집 『빈말과 헛말 사이에 강이 흐,』가 있음.
사과와 용서가 필요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고랑”은
점점 더 깊어진다. 이런 불행은 아마도 이미 “예비된” 것인지도 모른다.
출구 없는 절망 속에서 사태가 이대로 굳어져 갈 때, 시인은 모든 문장에서 ‘종결어미’를
생략함으로써 문장이 불행을 완성하는 것을 막는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joins.com/201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