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역
◈이덕규◈
이쯤에서 남은 것이 없으면
반쯤은 성공한 거다
밤을 새워 어둠 속을 달려온 열차가
막다른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처럼
길게 한 번 울부짖고
더운 숨을 몰아쉬는 종착역
긴 나무의자에 몸을 깊숙이 구겨넣고
시린 가슴팍에
잔숨결이나 불어넣고 있는
한 사내의 나머지 실패한 쪽으로
등 돌려 누운 선잠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 툭 떨어지고
그 위로 오늘 날짜
별 내용 없는 조간신문이
조용히 덮이는
다음 역을 묻지 않는
여기서는 그걸 첫차라 부른다
-이덕규作 <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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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규=(1961~ ) 경기 화성에서 출생.
1998년 《현대시학》에 〈揚水機〉외 네 편을 발표 등단
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등
2004년 제9회 <현대시학작품상> 수상
2009년 시집 『밥그릇 경전』(실천문학) 출간
■막차를 타고 종착역까지 가본 사람은 안다. 지친 짐승처럼 몸을 누인 열차에서 내려 차가
운 나무의자에 앉아본 사람은 안다. 인생이 얼마나 쓸쓸하고 적막한지. 낯선 도시의 불빛들
은 또 얼마나 그리운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지. 삶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온 막차는 종착
역에 모든 사연을 내려놓는다.
그곳에서 밤을 보낸 막차는 다음날 새벽 첫차가 되어 떠난다. 그래서 시인의 말처럼 여기서
는 막차를 첫차라고도 부른다. 쓸쓸한 종착역의 풍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 펼쳐진다. 꼬깃꼬
깃한 지폐처럼 지친 삶들이 내일을 기약하며 뿔뿔이 흩어지는 종착역.
그래도 내일이 오면 어김없이 첫차는 떠난다. 인생이 늘 그렇듯. 막차가 있으면 첫차가 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듯이. 세상의 모든 막차는 곧 첫차다.
[허연 문화전문 기자(시인)] [시가 있는 월요일]
mk.co.kr/2016.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