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 앞, 횡단보도 옆,
하염없이 서 있는 키 큰 사내
태풍이 불어와도 끄덕 않더니
어느 깊은 가을날 문득,
기다리는 건 결코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렸나
하룻밤 새 백발이 되었다는 사람처럼
맥없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네
파르르 파르르 떨며
상상 속 수없이 그리던
만남의 장면들 발밑에 떨구네
차곡차곡 쌓이는
저 노오란 빈혈을 어쩌나
눈물에 젖은 저 샛노란 편지들을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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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숙=1999년 '시와사상' 등단,
시집 '전갈' '염소좌 아래 잠들다'
〈시작노트〉 가을이 깊었다. 거리의 가로수들이 물들어 단풍진 잎들이 바람에
자꾸 떨어진다. 벚나무와 느티나무, 은행나무들이 아름답게 물들었다가 여위어간다.
그 중에서도 유독 은행나무 잎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날이 있다. 해가 나지 않아
어둑신하고, 공연히 쓸쓸한 그런 날, 온 거리를 노오랗게 물들이며 한꺼번에 떨어져
내리는 그 잎들 때문에, 가슴이 무너진 적이 있다.
kookje.co.kr2013-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