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 鐘 -고찬규-
구부린 등은 종이었다
해질녘,
구겨진 빛을 펼치는
종소리를 듣는다. 한 가닥
햇빛이 소중해지는
진펄밭 썰물 때면
패인 상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호밋날로 캐내는, 한 생애
쪼그린 아낙의 등 뒤로
끄덕이며 끄덕이며 나귀처럼
고개 숙이는 햇살
어둠이 찾아오면, 소리없이
밀물에 잠기는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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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규=1969년 전북 부안 출생.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수료.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가 있음.
만추(晩秋)라는 놈이 찬비 뿌린 틈을 타 밀어닥쳐서는 마당을 온통 어질러놓았다.
갖가지 빛깔의 나뭇잎들이 여기저기 지천이다. 바람도 없는데 끊임없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앉는 한 생애들. 겨울나기를 위한 나무들의일종의 의식(儀式)이다. 길고 긴
종소리가 멀리서부터 오는 듯만 하다. 겸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저
나뭇잎만 같은 것이 아닌가.
해 저무는 뻘밭에 등을 둥그렇게 말고는 조개를 캐는 아낙이 있다. 한 생애를 그 썰물의
개펄 속에서만 지냈다. 그녀에게서 문득 종소리가 들려온다. 저 가난하고 힘겨운 운명을
온몸으로 긍정한 거룩함이, 파동이 되어 저무는햇빛과 함께 눈에 닿고 그리고 가슴에
닿는다. 가슴에 노을이 '울려' 퍼진다.
밀레는 '만종'에 기도를 올리는 가난한 농부 부부를 그렸다. 그 종소리는 전 인류의 눈에
'울려' 퍼졌다. '나귀처럼' 운명에 순응하며, 곧 찾아올 어둠에 지워질 것이나 여전히
거룩한 생명. 밀물에 지워지는 한 소박한 생애를 생각하는 저녁이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Chosun.com 2013.11.11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