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엔자
⊙김혜순⊙
새라고 발음하면
내 몸에서 바람만 남고
물도 불도 흙도 다 사라지는 듯
그 이름 새는 새라는 이름의 질병인가
새는 종유석 같은 내 뼈에서 바람 소리가 나게 한다
날지 못하는 새들은 다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죽일 새도 없으니 산 채로 자루에 넣어
구덩이에 파묻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 시집와서 며칠 후 도마 위에 병아리를 올리고
그 털 벗은 것에 칼을 들어 내리치려 할 때
갓 낳은 아기의 다리를 잡고 있던 기분
그 털 벗은 것이 바들바들 떠는 것 같아
강보에 싸서 안아주고 싶었다
제 가슴을 베개 삼아 머릴 드리우고 잠들던 그것
정말 우리는 끝 가까이 다 온 걸까?
악몽의 막이 찢기고 그 속에서 죽음이 탄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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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1955~ )-경북 울진 출생
-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불쌍한 사랑기계'
-97년 김수영문학상, 2000년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지평선' 외 14편
가장 여린 감성을 구사하는 방식으로 가장 참혹한 현실을 고발한다. ‘명령’이 그리 아플
수 없고 고발이 스스로 가여워질밖에 없다. 인간은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만
다른 생명보다 더 진화했다.
그 연민도 스스로 여리디 여려지는 쪽을 택한다. 희생되는 짐승들보다 인간이 차라리 말
짱한 채로 더 가여워질 때까지. 모더니즘이 시사(時事)를 제대로 만나 이룬 기적 가운데
하나.
<김정환·시인>
joins.com./2014.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