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모자 속에 전구를 켜고
누가 밤보다 더 어두운 방으로 숨어드나.
비는 폭포처럼 퍼붓고
아가씨는 머리칼이 젖어 빗속을 달려가는데.
꽃잎은 으깨지고 줄기는 휘어지는데.
누가 이렇게 어려운 식물을 키우고 있나.
아침은 단호하게 시작된다.
떨어져 잿빛 바닥에 깔린 꽃잎 위로,
배낭을 메고 걷는 자의 검은 머리통에서도.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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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미=(1967~ )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2001년 『문학과사회』에 시 「나는 쓴다」외
3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칠 일이 지나고 오늘』이 있다.
어둠이 세계를 덮는 밤은 거대한 빛의 무덤이다. 밤은 소설가 생텍쥐페리가 말했듯 “인간
이 자아의 파편들을 다시 조립하고 고요한 나무와 함께 성장”하는 시간이다. 야행성동물
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에 불을 켜고 포획한 짐승의 피를 빨고 살점을 뜯는다.
이 유혈 낭자한 동물의 밤에 견줘 식물의 밤은 상대적으로 고요하다. 제자리에 직립한 채
고요의 형상을 빚는 식물의 밤은 고요하기만 할까? 시인은 밤에 “누가 부러진 허리를 세우
며 피리를 부나”라고 묻는다. 꽃잎이 으깨지고 줄기는 휘어진 채 피리를 불어야 하는 식물
의 밤도 있음을 알린다.
<장석주·시인>
joins.com/2015.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