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에서는
풀들의 몸놀림을 한다.
나뭇가지를 지날 적에는
나뭇가지의 소리를 낸다….
풀밭에 나뭇가지에
보일 듯 보일 듯
벽공에
사과알 하나를 익게 하고
가장자리에
금빛 깃의 새들을 날린다.
일러스트/송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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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1922~2004) 경남 통영 출생
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 출간
86년 '김춘수 시전집'(서문당) 출간
2004년 '김춘수 전집'(현대문학) 출간,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수상
바람이 지나간다. 희맑은 바람이 지나간다. 풀밭에 가서는 풀의 행세를 한다. 풀처럼 눕고
풀처럼 일어선다. 나뭇가지에게 가서는 나뭇가지가 되어 제 몸을 흔든다. 벽공(碧空)에,
푸른 하늘에 언뜻 스치고 지나간다. 한 알의 사과알을 붉게 익게 한다. 새의 금빛 깃을 날
리게도 한다.
바람은 모든 것과 잘 호응한다. 부름에 잘 응답한다. 사람의 호흡 속에 살기도 하고, 한 그
루 수양버들 속에 몸을 길게 늘어뜨리기도 하고, 산마루에 높이 오르기도 하고, 단풍잎에
올망졸망 매달려 있기도 하고, 환한 햇빛 속에 눈부시게 서 있기도 한다. 물처럼 흐르고 흘
러 가리는 것이 없다. 활짝 트여 마음을 후련하게 한다. 그 눈짓도 참 좋다.
문태준 시인 [가슴으로 읽는 시]
Chosun.com/2015.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