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이 피던 날
◆홍윤숙◆
아직 발이 시린
이월 어느 날 아침
수증기 서린 유리창 앞에
푸른 도포 차림의 선비 세분이
상아로 세공한 부채를 들고
말없이 단아하게 서 계셨다
나는 너무 황망하여 어쩔 줄 모르고
버선발로 뛰어나가 허리 깊이 꺾고
절하였다
그 청아함에 눈부시어 감히
반가운 악수도 청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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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숙=(1925~2015)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47년 문예신보에 시 ‘가을’을, 1948년 ‘신천지’에 ‘낙엽의 노래’를,
같은 해 ‘예술평론’에 ‘까마귀’ 등을 실으며 작품활동을 시작
1962년 시집 ‘여사시집’을 시작으로 ‘풍차’(1964), ‘장식론’(1968) 등
모두 17권의 시집을 냈다. 마지막 시집으로 여긴 2010년 새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 2012년 시집 ‘그 소식’을 내는 등 최근까지 작품활동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공초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
시인은 막바지에 이른 겨울의 끝에서 난 꽃이 피어난 일의 경이를 이렇게 시로 썼다. 단정
하고 아담하게 핀 꽃의 자태는 선비의 외양과 태도에 견주어지고 있다. 고요한 성품의 난
은 속된 티가 없이 맑은 꽃을, 상앗빛 꽃을 어느 날 아침 피워 올렸다.
설한(雪寒)을 견뎌낸 후의 꽃핌이니 그 향기는 얼마나 진할 것인가. 너무나 반가워 미처 신
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가 난 꽃을 맞아들이는 시인의 성정 또한 고아하고 아름답다고 아니
할 수 없다.
홍윤숙 시인은 "시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변경의 파수꾼이었다. 후미지고 버림받은 위난의
땅을 지키는 파수꾼이다"고 말했다. 온갖 세사(世事)가 위중할 때에 이 시를 읽으니 소란스
럽고 격앙된 것이 진정되는 느낌이다.
문태준 시인 [가슴으로 읽는 시]
Chosun.com/2016.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