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생각
◈이병일◈
풀은 생각 없이 푸르고 생각 없이 자란다
생각도 아무 때나 자라고 아무 때나 푸르다
그 둘이 고요히 고요히 소슬함에 흔들릴 때
오늘은 웬일인지
소와 말도 생각 없는 풀을 먹고
생각 없이 잘 자란다고
고개를 높이 쳐들고 조용히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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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1981~ ) 전북 진안에서 출생.
2004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곰팡이〉당선되어 등단 2010년
〈조선일보〉신춘문예 희곡 당선. 시집
<옆구리의 발견>(2012, 창비) 이 있음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여름은 풀의 계절이다. 여름의 풀은 지친 기색이 없다. 시원한 폭포수처럼 세차게 자란다.
여름에는 그늘에서도 풀이 자란다. 풀이 이처럼 자라니 풀을 베는 쪽은 일손이 부족하다.
곳곳에 예초기를 짊어진 사람을 볼 수 있고, 또 그들의 둘레에는 갓 베어낸 풀 냄새가 흥건
하다.
풀이 자라남에 있어 '생각 없이 자란다'는 뜻은 무위(無爲)를 말한 것이 아닐까 한다. 억지
를 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들판의 가축도 평화롭게 그들의 뜻에 따라 푸른 풀을 뜯어 먹
으니 억지를 쓰는 일이 없다.
풀은 풋풋하고 싱그럽다. 쾌적한 생기 그 자체이다. 한 시인은 부드럽게 돋아나는 풀 덕택
에 딱딱하고 견고한 대지의 성질이 너그러워진다고도 했다.
문태준 시인 [가슴으로 읽는 시]
Chosun.com/2016.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