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중소(中沼)
◈박진규◈
갈겨니는 계속 물빛이어서
계곡이 아무리 유리알처럼 투명하여도
자신은 감쪽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하루 종일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 상수리나무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물속을 헤집고 다니는 갈겨니
그 여리디여린 몸이 가을빛을 받아
바닥에 지 몸보다 더 큰 그림자를 끌고 다닌다는 것을
상수리나무는 행여 배고픈 날짐승이 눈치챌까봐
아침부터 우수수 이파리들을 떨어뜨려
어린 갈겨니를 덮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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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1963년 부산 기장 출생.
국제신문 신춘문예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당선.
부경대 수산교육학과 졸업. 부산매일신문 기자 역임.
현재 부경대 홍보팀장.2010년 국제신문 '잡어' 동인.
무감한 사물에 인간의 감정을 투여하는 센티멘털리즘을 존 러스킨(J Ruskin)은 “감상적
오류(pathetic fallacy)”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모든 지각(知覺)은 사물에 대한 ‘해석’이고,
해석은 불가피하게도 지적·정서적 ‘투여’를 거칠 수밖에 없다.
이 시에는 무방비 상태의 어린 갈겨니가 행여 “배고픈 날짐승”에게 당할까 봐 “우수수 이
파리들”을 떨어뜨려 가려주는 “늙은 상수리나무”의 따뜻한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고스란
히 시인의 마음이기도 하니, 이 가을에 이처럼 모두 따스하시기를.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joins.com/2016.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