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싶은詩(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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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오탁번**
할아버지 ◆오탁번◆ 느티나무 아래서 평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말복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달려오던 빨간 자동차가 끽 멈춰섰다 운전석 차창이 쏙 열리더니 마흔 살 될까 말까 한 아줌마가 고개도 까딱하지 않고 - 할아버지! 진소천 가는 길이 어디죠? 꼬나보듯 묻는다 부채를 탁 접으며 나는 말했다 - 쭉 내려가면 돼요, 할머니! 내 말을 듣고는 앗, 뜨거! 놀란 듯 자동차가 달아났다 우리나라에는 단군할아버지 말고는 ‘할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유관순 누나 생각하면 나는 어린이집에도 아직 못 간 앱솔루트 분유 먹는 절대적인 갓난애야! ‘할아버지’라니? 고얀 년 같으니라구! =====================================================================..
2020.07.22 -
**외팔이 짜장면집-최달연**
외팔이 짜장면 -최달연- 함양 마천 피아골에 가면 외팔로 탁, 탁 짜장면 가락을 뽑아내는 그 사내가 있다 구로공단 생활 25년으로 한쪽 팔을 잃고 웅크린 한쪽 죽지 잃은 새가 되어 절뚝거리며 실상사 근처로 내려앉은 세월 소림사 혜가 스님처럼 살고 싶어 그 근처 둥지를 틀었다 피아골 핏빛 단풍철에 미쳐 밀가루 범벅 휘파람새 같은 마천 골짜기 외팔이 짜장면집 사장이 되어 밥걱정은 면했지만 기울어진 개암나무처럼 외로운 그는 지리산을 닮았다 마음에 흉터가 깊다 ====================================================================== 백 년 만의 더위가 온다는 소문 무성하다. 붉은 태양 이글거릴수록 푸른 그늘 또한 깊어지는 피아골에 가서, 저이가 외팔로 뽑아낸..
2020.07.20 -
**[시로여는 수요일] 웃음 세 송이-고진하**
웃음 세 송이 ◇고진하◇ 하루치 근심이 무거워 턱을 괴고 있는 사람처럼 꽃 핀 머리가 무거운 해바라기들은 이끼 낀 돌담에 등을 척 기대고 있네 웃음 세 송이! 웃음이 저렇듯 무거운 줄 처음 알았네 오호라, 호탕한 웃음이 무거워 나도 어디 돌담 같은 데 척 기대고 싶네 ============================================================================ 하, 하, 하! 하루 종일 해님을 바라보며 동에서 서로 고개가 돌아가지. 연모하는 자는 연모하는 이를 닮아가지. 커다랗고 둥근 얼굴 한가득 웃음이 그득하지. 해바라기들은 웃음 중독자들, 비가 와도 웃음을 그치지 않지. 하지만 가장자리 노란 혀꽃이 웃는 동안 가슴 한복판 통꽃은 갈색으로 타들어 가고 있지. ..
2020.05.27 -
**[시가 있는 월요일] 나무 앞에선 몸을 낮춰라**
나무 앞에선 몸을 낮춰라 ◇유이우◇ 나무는 또 나무를 늘어트리고 잠자리의 비행 속도를 떨어트린다 구름이랑 하늘이랑 누가 더 오래 살까 (중략) 나무보다 작게 세상은 지나다니고 나무가 비키지 않으면 세상이 나무를 돌아 간다 모든 나뭇가지가 어긋난 약속 같아서 나뭇가지가 모두 ..
2020.05.18 -
**[시로여는 수요일] 봄비**
봄 비 ―박기섭 하늘 어느 한갓진 데 국수틀을 걸어 놓고 봄비는 가지런히 면발들을 뽑고 있다 산동네 늦잔칫집에 安南 색시 오던 날 ................................................................................................................................. 봄 들판 적시는 빗줄기 가늘고 곱다 싶었는데 그 동네..
2020.05.15 -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113)삼우(三虞)**
삼우(三虞) ―이대흠(1967~ ) 당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여읠 때 비가 왔어요 허공 풍선에서 푸시시 빗방울들이 빠져나오고 모과나무 묵은 옹이는 마음에 불거진 남북처럼 불쑥 나타났어요 하늘에서 하늘이 다 달아나버리고 하늘이 지워졌어요 어제까지 보였던 당신인데 당신은 내 마음속..
2020.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