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을
-허영자-
걸음마다
씽씽 신바람 일고
휘파람 소리, 그 휘파람 소리
가슴 울렁거리던
천둥 번개의 사나이들
어디로 갔나.
가을 빈 들판은
패망의 왕국
목발에 의지한
허수아비 하나
마지막 노병으로
지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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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자=1938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사모곡>으로 등단. 시집으로
『가슴엔 듯 눈에 듯』, 『친전』, 『어여쁨이여, 어찌 꽃뿐이랴』,
『빈 들판을 걸어가면』등이 있음. 현재 성신여대 교수로 재직 中.
1998년 제3회 민족문학상 수상.
첫 서리가 오는 즈음에는 들판에 가서 한참 둘러볼 일이다. 그만한 성지(聖地)가
따로 없다. 조금씩 식어가는 태양의 온도, 펄럭이는 바람. 싱싱한 빛을 등에 지고
어깨동무하여 못자리로 들어가던 물길은 다 말랐다. 개구리, 뱀, 메뚜기, 뜸부기
등속의 흥성하던 뭇 생명들은 또 다 어디로 깃들여 갔단 말인가.
뭇 처녀들의 가슴을 흔들던 푸른 이마의 청춘들, 단단한 팔뚝과 '꽝꽝한 이빨'의
웃음들은 다 어디로 가고 무너진 논두렁, 말라 비틀린 물꼬만이 백골처럼 누웠다.
들판이 그러하듯이 인생이 그러한 것이다. 오월 난초와 유월 목단, 팔월 보름, 시월
단풍을 다 접고 일어날 시간. 무서리의 가을이다.
'휘파람' 불던 '천둥 번개의 사나이들/ 어디로 갔나' … 이 구절만으로 이 시는
천둥 번개의 시가 되었다! 나는 과연 천둥 번개의 사나이였는지. 나는, 다시, 천둥
번개의 사나이 하나를 데리고 휘파람 불며 등 뒤에 아름다운 들판을 남긴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Chosun.com-2013.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