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자나무 붉은 꽃이
따순 햇살에 환하고
탑리여중 순진한 소녀들이
단발머리를 자꾸 매만지며
철없이 깔깔거리고 있을 때면
좋겠다
우보 어디쯤 지나고 있을
발걸음 느린 화물열차가
곤한 숨소리를 연방
내 핏줄기 속으로 들이밀어도
좋겠다
모든 것 내려놓고
한숨 늘어지게 자다가
그 옛날 석공의 우직한 망치가
정수리를 내리쳐 그만
푸른 멍 하나 받고 깨어났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지우지 않을 그 멍으로
세상 깊숙이 들어가서
오래오래 서 있고 싶다
-시집 '상처의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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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임수=1966년 충남 부여 출생.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 등단.
시집 '상처의 집'.
어쩌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이면 가끔 떠오르는 풍경 하나. 나른한 봄날의 한가운데
양지바른 고향집 뒤란에 앉아 아무생각 없이 졸아보는 일이다. 둥지를 떠나면서
이미 돌탑 속에 묻어버렸지만 나이 들수록 더 간절하게 살아나는 꿈. 그렇게 다 내려
놓고 졸다가 우직한 석공의 망치에 화들짝 깨어 그 푸른 멍 하나로 또 한세상 건너
보는 일이다.